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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문학

귀족의 가난, 이상주의자의 삶 : 빌리에 드 릴-아당

by 북페스트 2026. 6. 16.

Auguste 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

이상주의자의 자존심 — 빌리에 드 릴-아당

1871년, 빌리에 드 릴-아당(Auguste Villiers de l'Isle-Adam)의 이모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그를 먹여 살린 유일한 후원자였다. 이후 그는 집달관에게 가구를 압수당한 채 맨 마룻바닥에 엎드려 글을 썼다. 친구 레옹 블루아가 남긴 증언이다. 그 자세로 쓴 소설이 『미래의 이브 』였다.
가난은 그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귀족적 자존심을 강화했다. 몰타 기사단 총장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그는 평생 놓지 않았다. 현실이 그 혈통에 어울리지 않을수록, 현실 쪽을 의심하는 쪽을 택했다. 이것이 빌리에 드 릴-아당이라는 작가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다. 그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상 쪽이 진짜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귀족의 가난, 이상주의자의 삶

1838년 11월 7일,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생브리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마리-마티아-필리프-오귀스트, 콩트 드 빌리에 드 릴-아당(Jean-Marie-Mathias-Philippe-Auguste, comte de Villiers de l'Isle-Adam). 이름만으로 지면 두 줄이 넘는다. 실제 삶은 그 이름과 극단적으로 어긋났다.
부친은 기사단의 잃어버린 보물을 찾겠다며 가산을 탕진했다. 빌리에의 교육은 학교를 예닐곱 차례 옮겨 다니며 이어졌다. 어린 시절 짝사랑하던 소녀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 죽음이 그의 상상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죽은 여성에 대한 이상화, 영혼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환멸은 이후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주제가 된다.

1860년, 이모의 지원으로 파리에 정착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것은 보헤미안들의 집결지 브라스리 데 마르티르(Brasserie des Martyrs)였다. 거기서 우상 샤를 보들레르를 만났다. 보들레르는 에드거 앨런 포를 읽으라고 권했다. 포와 보들레르, 이 두 사람이 빌리에 문체의 골격을 결정했다. 어둠, 아이러니, 죽음에 대한 심미적 응시가 그것이다.

1864년에는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와 처음 만났다. 이 우정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말라르메는 빌리에를 가장 가까운 문학적 동반자로 여겼고, 그의 장례식에서 직접 추도사를 낭독했다. 동시대 문인들 중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와도 교류했다. 스위스까지 찾아가 만날 만큼 바그너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명성과 생계는 따로 움직였다. 주류 신문들은 그의 소설이 너무 기이하다며 거절했다. 극장들은 그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복싱 강습을 하고, 장의사 보조로 일하고, 곡마사 조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때 호랑이 우리 안에서 유료 관객에게 시를 낭독하겠다는 구상도 했다고 전한다.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발상 자체가 빌리에라는 인간을 말해준다. 위엄과 기행이 공존하는 인물이었다.

세 개의 작품, 하나의 세계관

빌리에의 문학 세계는 세 작품으로 요약된다. 단편집『잔인한 이야기들 』(1883), 소설 』『미래의 이브(L'Ève future) 』(1886), 희곡 『악셀(Axël)』(1890). 세 작품은 장르가 다르지만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현실은 가짜다, 이상이 진짜다.

『잔인한 이야기들』은 2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단편 장르 ‘콩트 크뤼엘(conte cruel)’, 즉 잔인한 이야기라는 명칭 자체가 이 작품집에서 유래했다. 제목이 주는 공포와 달리, 칼날은 부르주아 도덕을 향한다. 빌리에의 풍자는 냉정하고 냉소적이었다. 당대 모파상과 함께 최고의 단편 작가로 꼽혔던 것은 이 집약된 아이러니 때문이었다.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가 1884년 소설 『거꾸로(À rebours)』에서 이 작품집을 격찬하면서 독자층이 급격히 넓어졌다. 빌리에는 그제야 경제적 숨통이 조금 트였다. 그러나 이미 위암이 진행 중이었다.

『미래의 이브』는 다른 차원의 작품이다. 허구의 에디슨이 등장한다. 그는 영혼 없는 아름다운 여성의 인조인간 복제 ‘아달리(Hadaly)’를 만든다. ‘안드로이드(android)’라는 단어를 문학에 처음 대중화한 소설이 바로 이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나 아시모프가 도달하기 한 세기 전에 이미 인간-기계의 경계를 문제 삼았다.

그런데 이 소설의 핵심은 SF가 아니다. 빌리에의 질문은 이것이다. 아름다운 외형과 텅 빈 내면이 공존할 때, 진짜 여성을 사랑할 것인가, 완벽한 복제품을 선택할 것인가. 현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상의 모조품이라도 붙잡을 것인가. 소설의 남주인공은 후자를 택한다. 빌리에가 이 선택에 동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1880년대에 던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악셀』은 그의 자부심이었고, 그의 미완성이었다. 1869년경 집필을 시작해 사망할 때까지 20년 넘게 고쳐 썼다. 책으로 묶인 것은 1890년,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였다. 빅토르 위고의 낭만극, 『괴테의파우스트 』, 바그너의 악극이 한꺼번에 녹아 있다. 무대는 1828년 독일의 어느 성. 두 인물이 삶 자체를 거부하는 장면으로 절정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대사가 이 장면에서 나온다. “Vivre? les serviteurs feront cela pour nous.” (산다는 것? 하인들이 우리 대신 살아갈 것이오.) 이 한 문장에 빌리에의 이상주의가 농축되어 있다. 현실적 삶, 일상적 생존은 하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상의 영역에만 머물겠다는 선언이다. 퇴폐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빌리에에게는 지극히 진지한 철학적 결론이었다.

상징주의의 선구이자 이방인

빌리에 드 릴-아당은 프랑스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분류된다. 이 호칭은 정확하지만 절반만 맞다. 상징주의 문학 운동을 조직화하고 대중화한 것은 말라르메와 베를렌이었다. 빌리에는 그 운동 안에 있었다기보다, 그 운동이 가리킨 방향을 혼자 먼저 걷고 있었다.

그의 사상적 배경은 세 층위로 이루어진다. 쇼펜하우어 철학, 가톨릭 신비주의, 바그너 음악극이다. 쇼펜하우어는 현실을 의지의 맹목적 표현으로 봤다. 그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로 예술을 제시했다. 빌리에는 이 철학을 자기 방식으로 흡수했다. 가톨릭 신앙은 소렘 수도원 수련을 통해 내면화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독실하고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유지됐다. 바그너 음악은 총체 예술의 개념, 즉 음악·시·극이 하나로 통합되는 이상을 제공했다. 『악셀』의 과잉과 장대함은 이 영향 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풍부한 사상적 배경이 그를 당대의 시장에서 구해주지는 않았다. 희곡들은 공연 불가 판정을 받았다. 지나치게 길고, 무대 연출이 불가능하며, 철학 강의에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악셀』은 빌리에가 최고 걸작으로 자부했지만, 비평가들은 그보다 단편을 더 높이 평가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이 가장 덜 인정받았다.

그의 전기적 삶에는 결혼 이야기도 있다. 몇 차례 부유한 상속녀와의 혼인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결혼한 것은 임종 직전이었다. 상대는 세탁부였던 내연녀 마리 당틴이었다. 아들 ‘토토르’의 법적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주의자의 최후는 이렇게 조용하고 구체적인 현실의 몸짓으로 마무리됐다.

1889년 8월 18일, 빌리에는 파리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0세였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사후에 도착한 인정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은 1931년 저서 『악셀의 성』(Axel's Castle: A Study in the Imaginative Literature of 1870–1930)에서 서구 모더니즘 문학의 기원을 추적하며 빌리에의 희곡 『악셀』을 다룬다. 책 제목 자체가 빌리에의 인물 이름이다. 윌슨은 예이츠, 조이스, 엘리엇, 프루스트로 이어지는 모더니즘의 계보를 분석하며 마지막 부분에 별도의 장으로 랭보와 빌리에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모리스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는 빌리에에게서 상징주의 극의 문법을 직접 전수받았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 B. Yeats)는 빌리에를 읽었고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H. P. 러브크래프트는 단편 <희망의 고문>(A Torture by Hope)을 특히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래의 이브』는 다른 경로로 살아남았다. 이 소설이 대중화한 ‘안드로이드’라는 단어는 지금 일상어가 됐다. 운영체제 이름으로도 쓰인다. 19세기 소설 속 인조인간 아달리에서 출발한 단어가 21세기 스마트폰 플랫폼까지 이어졌다. 빌리에가 예상한 미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던진 질문은 살아 있다. 영혼 없는 완벽함을 우리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단편집『잔인한 이야기들 』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콩트 크뤼엘이라는 장르명은 빌리에 이후 독립적 문학 범주로 자리를 잡았다. 아이러니와 역전,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해부하는 이 형식은 20세기 단편 문학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왜 지금 빌리에를 읽는가

빌리에 드 릴-아당을 읽는 이유는 그가 선구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문학이 제기한 질문이 아직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주의 문학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대에 역방향으로 걸었다. 졸라(Émile Zola)와 모파상이 현실을 정밀하게 해부하는 동안, 빌리에는 현실이 해부할 가치가 있는지를 의심했다. 물질 세계보다 상상의 세계가 더 진실하다고 썼다. 이것은 단순한 낭만주의적 퇴행이 아니었다. 실증주의와 자본주의가 이상을 밀어내는 방식에 대한 정면 거부였다.

그 거부는 삶으로 실증됐다. 가구를 빼앗긴 채 마룻바닥에서 글을 쓰면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대중이 원하는 형식을 쓰지 않았다. 위스망스의 격찬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 무명으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알면서도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문학이 지금도 하나의 태도로 읽히는 이유다. 작품보다 먼저 그 삶이 하나의 선언이다. 이상을 위해 현실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빌리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인들이 대신 살아줄 것이다, 라고 썼다. 그리고 그 대사를 완성하기 위해 20년을 썼다. 미완인 채로 죽었다. 그 미완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이었다.

 

—— 주요 작품 ——
『잔인한 이야기들 (Contes cruels)』 1883
『미래의 이브 (L'Ève future)』 1886
『악셀 (Axël)』 1890 (사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