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랑스문학

유해한 남자 — 펠릭스 발로통 장편소설

by 북페스트 2026. 4. 27.

그림자의 화가가 쓴 가장 어두운 소설
화가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떤 화가들은 붓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쏟아낸다. 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 1865~1925)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결혼 후 프랑스로 귀화한 화가로, 나비(Nabi)파에 합류해 전통적 기법을 버리고 보다 장식적인 화풍을 선보인 발로통은, 화폭 위에 부르주아의 위선과 일상의 이면을 날카롭게 담아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술 비평을 출판하는 등 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소설『유해한 남자(La Vie meurtrière)』는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1907년 한 해 동안 발로통은 어둡고 환멸에 찬 소설 쓰기에 몰두했으며,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유해한 남자』는 1927년 작가의 일곱 점의 삽화와 함께 사후 출판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발로통이 세상에 직접 내놓지 못하고 떠난 유언과도 같은 소설이다.

죽은 자가 남긴 고백 — 이야기의 구조
저명한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 『유해한 남자』는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집필되어 사후인 1927년에 출판되었으며, 불안하고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스물여덟 살의 예술가 자크 베르디에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사건을 조사하러 온 경감에게 짧은 편지와 봉투 하나를 남겼고, 그 봉투 안에는 '하나의 사랑(Un amour)'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원고가 들어 있었으며, 이 원고는 한 인간의 불행한 삶을 가차 없이 펼쳐 보인다. 
소설은 이처럼 이중 액자 구조를 취한다. 독자는 죽은 자가 스스로 기록한 원고를 통해, 그가 살아온 삶의 전모를 역순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 형식적 선택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결말을 알고 시작하는 서사가 주는 독특한 공포와 비애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다.
그 원고는 1인칭으로 자신이 평생 연이어 저지른 일련의 죽음들을 서술하는데, 이는 우연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그가 직접 유발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어두운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 불길한 저주에 대한 책임감에 시달린 끝에 자살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결론 내린다. 


'죽음의 원리'를 품은 남자
주인공 자크 베르디에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존재로 인식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끔찍한 사고와 죽음을 연이어 일으켰다. 심장마비, 추락, 독살, 화상이 그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자신의 책임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다. 과연 자크는 스스로 믿었던 것처럼 '치명적인 힘'과 '죽음의 원리'를 내면에 품고 있었던 것일까? 
『유해한 남자』는 누아르 소설과 사실주의 소설, 자전적 이야기의 경계를 오가는 작품으로, 스물여덟 살의 자살한 젊은 화가 자크 베르디에의 끔찍한 여정을 담고 있다. 그가 남긴 원고는 잔혹한 고백들로 가득 차 있으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불안은 거대한 사회적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 인물은 그다지 공감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다. 끔찍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비관적이며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하다. 어린 시절 그의 서투름은 두세 차례의 치명적인 사고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소설의 묘미가 발생한다. 독자는 이 불편한 인물을 따라가면서 그를 혐오하면서도 서서히 그의 내면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화가의 언어로 쓰인 소설
발로통은 화가였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일반적인 소설가의 것과 다르다. 쓰인 언어 속에서 화가가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로 작가와 어우러지며, 언어적 압축의 강렬함이 돋보인다. 이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등장하는 공포가 평범함과 나란히 놓이다가, 결국 독자에게 주먹처럼 다가온다. 
그의 색채와 형태에 대한 감각은 소설 속에서 문학적 언어로 전환된다.  실제로 프랑스 독자들은 이 소설을 두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장면을 묘사한다"고 평하곤 한다. 발로통의 목판화가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로 유명하듯, 이 소설 역시 명암의 대비가 극명하다.
발로통의 회화가 밝은 색채의 평면으로 유명한 것과 달리, 이 소설은 온통 잿빛으로 가득하며 비참함과 분노, 자기혐오만이 존재한다.  캔버스 위에서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세상을 담았던 화가가, 소설 속에서는 그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는 내면의 어둠을 응시한다. 이 대비가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
이 소설은 젊은 예술가의 내면의 불안을 묘사하는 동시에 사회의 거대한 불안과도 공명한다. 예리하고 환멸에 찬 젊은 화가(그리고 작가)의 시각을 통해, 이 어두운 소설은 놀라운 서술의 힘으로 비관적인 인식들을 제시한다. 
발로통이 나비파 동료들과 함께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가정의 이면을 폭로하는 목판화를 제작했던 것처럼, 이 소설도 단순한 개인 비극이 아닌 세기 전환기 파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짧은 소설을 읽고 세느강에 뛰어들거나 기차 앞에 몸을 던지고 싶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문체는 경쾌하고 부드러운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젊은이가 주변에 뿌리는 불행들을 읽다 보면 그의 순진함이 오히려 애처롭게 느껴져 결국 미소 짓게 된다. 

사후에 발견된 천재성
2025년, 그의 사후 100년을 맞아 스위스의 출판사 인폴리오(Infolio)가 『유해한 남자』의 새로운 판본을 출간하며 그를 재조명하고 있다. 생전에 그토록 많은 그림을 그렸던 화가가 남긴 소설 유산이 이제야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언어를 넘어서는 순간이 있고, 언어가 그림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다. 발로통은 두 영역 모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간의 불안과 죽음, 운명의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었다. 『유해한 남자』는 그 집요한 응시의 결정체다.

La Vie meurtrière | 펠릭스 발로통 지음 | 

 

 

유해한 남자 | 펠릭스 발로통

삶은 의도만큼 의도하지 않은 행위들로 결정되는 것일까. 28세의 젊은 미술평론가 자크 베르디에가 자기 삶을 반추한다. 타인의 죽음을 부르는 불길한 삶. 불의의 사고들. 누구를 해치려는 사악

www.aladin.co.kr